10월 26일 겁쟁이 페달 온리전 랑2 ~뜻밖의 배신~ 최종 부스인포 입니다.
[오시는 길]
T2 트윈지 '첫사랑'
A5/인쇄본/100p (만화파트 약 40p, 소설파트 약 60p, 이어지는 이야기)/9천원
치즈 (@cheese_pd) 만화
아라토도/여름감기/중철/16p/2500원
★ http://cheesetail.egloos.com/4364852
지소 (@S2rgr) 소설
토도마키/금서/중철/40p/4000원
★ 24일 금요일까지 수량조사 중입니다. ( http://me2.do/Ge2nRzg7 )
★ http://srkw.dothome.co.kr/xe/kb/24189
★8월 스온 [신아라] 웃을 줄 모르는 남자/6월 케스 [T2] 구슬 구간 소량 가져갑니다
1.
살풍경한 도서관에서 유일하게 쓸모없는 물건들이 놓인 곳은 마키시마가 앉은 그 소파 근처였다. 까맣고 낡은 소파 옆에 조그만 협탁이 하나 서있고 그 위엔 커다란 향초와 손가락만한 말 모형, 그리고 비슷한 크기의 모래시계 하나가 있었다. 이 도서관과 어울리지 않는 그 소품들 중 모래시계는 이미 그 안의 모래가 바닥으로 다 떨어진 지도 오래인지 잘록한 부분에 걸린 자잘한 먼지조차 없었다.
“다 떨어졌네…….”
마키시마가 멍하니 중얼거리는 순간 도서관 전체에 삐익―하는 기계음이 울렸다. 화들짝 놀란 그가 어깨를 움찔 떨자 여태까지 책에만 시선을 처박고 있던 학생이 느리게 고갤 들며 웃었다.
“시계 소리야.”
음침한 얼굴의 남학생은 손가락으로 벽에 붙은 디지털 시계를 가리켰다. 마키시마가 그곳을 바라보자 새빨간 글씨가 선명하게 11시 1분을 나타내고 있었다.
"매 시간 울리는 건데, 정각에 안 울리고 꼭 1분 늦게 울리더라고."
남학생은 묻지 않은 이야기를 하곤 다시 자신이 들고 있던 책으로 고갤 돌렸다. 괜히 섬뜩한 기분이 되어 시계를 등지고 앉은 마키시마가 모래시계를 톡, 뒤집었다. 허리가 잘록한 유리병 안의 모래가 바닥을 향해 소리도 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그걸 멍하니 바라보다 곧 허벅지 위에 올려뒀던 책을 펼쳤다. 그 순간이었다. 펼쳐진 책 사이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던 건. 또다시 깜짝 놀라 책을 떨어뜨린 마키시마가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사이, 눈조차 뜨기 힘들 정도로 강하게 쏟아지던 빛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리고 그 앞에 남자애 하나가 앉아있었다. 당황한 마키시마가 소파에 팔을 짚은 채 숨만 헉헉 쉬어대자 그는 하늘에서라도 떨어진 포즈로 얼굴을 찡그리며 앉아 마키시마를 바라봤다. 믿을 수 없지만, 정말 믿을 수 없지만 책에서 튀어나온 게 분명한 그 남자아이는 어떻게 봐도 자신과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교복은 아니었으나 깔끔한 반바지와 긴 티셔츠, 어깨에 닿는 까만 단발머리, 그리고 하얀 머리띠까지. 혹시, 그냥 지나가던 학생이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마키시마의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켜 결국은 공황상태가 된다.
“안녕.”
남자애는 이런 만남 치고는 제법 태평한 얼굴로 웃으며 인사했다.
“너구나? 이번에 나를 불러낸 사람이.”
마키시마가 당황한 얼굴로 도서관 입구를 향해 고갤 돌리자 그 근처에서 책을 읽던 남학생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니까, 이 도서관 안은 마키시마와 눈앞의 머리띠 남자, 단 둘이라는 소리다.
“왜 대답이 없어?”
“……너 누구야?”
여전히 경악에 찬 얼굴이 묻자 오히려 그쪽이 고갤 갸웃거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몰라? 난 하코네의 토도 진파치.”
자신만만한 얼굴로 대답한 ‘토도’는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산신이라고 불린다. 그보다 너, 아직 그거 안 봤구나? 책.”
그것은 대답을 기대하고 한 질문이 아니었던 듯, 자리에서 일어난 토도가 바지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2.
‘토도 진파치’의 말에 의하면, 그는 하코네 산에 오랫동안 숨어 살던 산신이라고 했다. 마키시마는 수업 중 들었던 여우를 떠올렸다. 책에서 나왔다던 그 여우. 그 편이 이 얄팍하게 생긴 얼굴과 더 잘 어울렸기에. 여하튼 그는 이유도 알 수 없고 주기도 일정하지 않지만 때때로 어떤 책에 의해 사람의 모습이 되어 이 세계로 불려나온다고 말했다.
“그럼 인간세계에 나오지 못했을 때엔 어디서 사는데?”
그는 대체 무엇을 묻느냐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당연히 산이지.”
“하아?”
그걸 지금 믿으라고 하는 소리인가? 마키시마가 긴 한숨을 내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이것은 지금 꿈인가, 아니면 정말로 현실인가.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으로도 모자라 더더욱 비현실적인 이야기가 귀를 타고 들려오고 있었다. 신? 산신!? 토도는 마키시마가 떨어뜨린 까만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나는 이곳에 나오는 산신 토도 진파치야. 그리고 주인공은 매번 바뀌게 되지. 봐, 내가 마지막으로 만났던 사람은 아라키타라는 난폭한 녀석이었어. 여기에 있지? 이름.”
그가 말하는 것들이 사실일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간에 토도와 아라키타의 이름이 그 책 안에, 토도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그 부분에 들어있기는 했다.
“내가 시간이 되어 다시 소멸하게 되면 이것은 너와 내 이야기로 바뀌게 될 거야. 쉽게 말하면 이 몸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이야기가 책에 기록된다는 거지.”
“그럼 그 전에 있던 내용은?”
마키시마가 기겁한 얼굴로 묻자 그는 담담한 얼굴로 고갤 내저었다.
“글쎄. 사라져버리더라고.”
“그 사람들은?”
“확신할 순 없지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어.”
토도의 이야기가 끝나자 다시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돌았다. 마키시마는 현실을 거부하는 머리에 강제로 다른 차원의 정보를 주입하고 있었고, 토도는 그것을 기다리는 듯 가지런히 앉아 마키시마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참이 지나 마키시마가 체념한 얼굴을 들었을 때, 토도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뭐, 그렇게 된 거지. 그럼 한동안 잘 부탁해, 마키쨩.”
“뭐니!? 그 소름 돋는 호칭은?”
“어라, 귀엽지 않아?”
대체 두 사람이 만난 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이 자칭 ‘산신’은.
“전혀.”
마키시마가 딱 잘라 말하며 일어섰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아직 토도에게 자기소개를 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러니까, 저 녀석은 정말로 상식 외의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그제야 피부에 와 닿기 시작했다.
3.
“너는 신기해.”
토도가 뜬금없는 소릴 꺼내자 머릿수건을 떨어뜨린 마키시마가 고갤 들었다.
“뭐가?”
“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잖아?”
마키시마는 천천히 고갤 저었다.
“별로……. 딱히 그런 건 아냐.”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귀신 취급했다고.”
토도가 가물가물한 과거를 떠올리며 얼굴을 찡그렸다. 정확하게 누가 그랬다는 건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그 상황과 불쾌했던 기분이 스멀스멀 떠오르는 것이다.
“한 명 정확하게 기억에 남아있는 사람이 있어.”
“……누군데?”
마키시마가 분주하게 머리의 물기를 털어냈다. 토도는 지금 생각해도 기분이 나쁜 듯 입술을 삐죽거리며 눈에 힘을 빡 줬다.
“이름 같은 건 기억도 나지 않지만 내가 나와 있는 내내 말을 안 걸었던 건 물론, 시선조차도 안 줬지.”
그가 불쾌한 얼굴로 천장을 노려봤다.
“나는 그때 가장 빠른 시간에 소멸했어.”
나흘이었나. 아마 체념을 함과 동시에 그대로 사라졌던 거라고 이제 와서 생각해본다. 가만히 앉아 토도의 이야기를 듣던 마키시마가 느리게 고갤 들었다.
“그럼 너와 친근하게 지낼수록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진다고 가정해도 되는 건가?”
“글쎄…….”
토도가 확신할 수 없는 말을 하며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눈을 감자 온 세상이 어두워지고, 귓가엔 마키시마의 옷가지가 스치는 소리밖에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곧 잠에 빠져들었다. 마치 사람처럼 잠든 토도를 바라보다 마키시마는 느리게 자신의 팔을 들어 그의 코 아래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부드럽게 호흡하는 소리와, 뜨거운 숨이 손가락을 간질였다.
“뭐, 당연한 건가…….”
그가 중얼거리며 축축한 머리에 마른 수건을 올렸다. 그리고 멍하니 생각했다. 토도의 소멸 조건을. 자신과 거리가 아주 멀어지면 소멸한다. 또, 사이가 소원해지면 빠르게 소멸하는 것 같다. 그리고 또 무슨 정보가 있었더라. 토도와 만난 것이 이제 고작 24시간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는다. 마키시마는 멍한 얼굴로 토도의 머리띠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조금 더 편안해진 얼굴이 이불에 얼굴을 묻었다.
4.
자전거에 올인하는 대신 수업만이라도 제대로 듣자던 다짐은 토도의 등장과 함께 와장창 무너지고 말았다. 당장 자전거마저도 탈 수가 없어 자신의 모든 생활을 정지시킨 것이다. 씽씽 달려 사라지자니 멀어지면 바로 소멸해버린다는 존재가 안타까웠고, 가만히 학교에서 수업이나 듣자니 바로 옆에서 알짱거리는 토도가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결국 두 사람이 찾아갈 수 있는 곳은 인적이 드문 도서관뿐이었다. 예의 그 소파에 앉아 토도의 희미해져가는 기억을 전해 듣던 마키시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 어제 책을 뽑아냈던 책꽂이 주변을 서성거렸다. 그 책은 부실에 두고 아예 꺼내보지도 않았다. 혹시 그거 말고 다른 책이 더 있는 건 아니겠지. 그가 토도의 목소리를 반쯤 흘려듣는 동안 또 한 번 도서관 전체에 삐익― 하는 기계음이 울렸다. 마키시마가 반사적으로 시계를 쳐다보자 그것은 ‘11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라, 저거 1분에 울린다는 거 아닌가.”
마키시마가 멍하니 중얼거리자 소파에서 일어난 토도가 가까이 다가와 어깨에 팔을 올렸다.
“아마 시간이 밀리는 걸 거야.”
“무슨 소리야?”
되돌아온 질문에 토도는 어떻게 설명을 할 수가 없다는 듯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뺨을 긁적였다.
“너와 내가 만나면서 시간에 틈이 생기고, 매일매일 그 틈만큼 점점 밀려나가는 거야.”
“……그 틈이라는 게 뭔데?”
“나도 잘 모르겠지만, 그게 점점 커져서 시계의 한 바퀴를 다 돌게 되면. 나는 사라지게 돼.”
또 소멸에 대한 이야기다. 마키시마는 어제 생각하던 ‘소멸 조건 리스트’에 하나를 더 추가했다. 대체 이 세계에 오는 목적이 무엇인지도 알 수가 없고, 사라지는 건 또 쉽게도 사라진다. 멋대로 끌고 와선 멋대로 다시 데려가는 거다. ‘시간의 틈’이라는 것도 그에게는 그저 알 수가 없는 단어였다.
“그럼 5분이 10분이 되고, 30분이 되고, 한 시간을 돌아 다시 1분이 되면 너는 사라진다는 뜻이야?”
마키시마가 묻자 토도는 이해를 해준 것 자체만으로도 감사하게 고갤 끄덕였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
두 번째의 질문에 그는 도서관의 낡은 천장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사실 소멸에 대한 것들은 벌써 몇 번이나 그걸 만났던 당사자인 토도 역시도 잘 알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냥 사라지는 거지. 그 전까지 함께 지내면 되는 거야.”
“대체 몇 개야. 또 있는 거 아냐? 네 소멸 조건.”
마키시마가 짜증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이젠 없는 것 같은데……. 아, 그렇지. 이건 사실 여태까지 경험해본 적은 없지만 왜인지 알고 있는 게 몇 개 있어. 그러니까, 네가 날 죽이면 난 소멸하게 될 거야.”
“미안하지만 살인엔 취미가 없어서.”
살인이라는 소리에 얼굴을 찡그린 마키시마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이것이 끝은 아니었던 듯 토도는 기억을 더듬는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며 눈을 찡그렸다.
“그리고 또 네가 스스로 책을 덮어주면 사라질 거야.”
“책?”
“내가 이곳에 나오게 된 바로 그 책 말야.”
금서. 마키시마는 어제 부실에 놓았던 까만 책을 떠올렸다.
“덮는다는 게 무슨 뜻인데?”
“그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고 덮는다는 뜻이지.”
“여태까지 그걸 다 읽어본 사람이 없다는 거야?”
“너 역시 그 책을 열어볼 생각도 안 했잖아?”
토도가 정곡을 찌르자 마키시마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시선을 피하는 마키시마를 향해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책을 반 이상 읽어본 사람이 없었어. 보통 나 때문에 책의 존재를 잊어버리거나, 오래 머무르게 하기 위해 독서를 포기하기도 했거든.”
담담한 목소리를 묵묵히 듣던 마키시마가 고갤 들었다.
“거기엔 네 인생이 쓰여 있다고 했잖아?”
“그렇지.”
“너는 그걸 어떻게 알았는데?”
“나도 반 정도는 읽어봤으니까.”
“그렇군.”
마키시마가 담담한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그리고 곧 떠오른 생각에 미간을 찡그리며 토도를 바라봤다.
“시간이 틀어지면서 공간이 변형되는 걸까?”
물론 토도는 대체 무슨 소릴 하느냔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키시마는 다시 소파에 앉은 토도를 두고 어디선가 많이 들어봤던 과학지식을 추적하기 시작했으나, 도서관 책꽂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책들은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그의 짧은 지식에 하나도 도움을 주지 못했다. 곧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마키시마가 몸을 돌리자 토도는 발을 통통 움직이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너 밥은?”
하얀 머리띠, 까만 단발머리의 뒤통수는 곧 고갤 돌린 토도의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
“별로 먹어본 적은 없어. 안 먹어도 죽지는 않더라고.”
하긴, 나와있는 시간 자체가 길지를 않으니 적어도 아사해본 적은 없을 테다.
“그럼, 산에선 뭘 먹었는데?”
“아무것도.”
토도가 깔끔하게 대꾸했다.
“아무것도?”
“애당초 산엔 나와 나무뿐이야. 그리고 언제나 바람이 불지. 아 그래, 바람을 먹고 자라는 건지도 몰라.”
토도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마키시마는 아마도 처음으로 그가 사람이 아닌 존재임을 완전히 실감했다. 고작 몇 줄도 안 되는 그 몇 마디로 이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임을. 그리고 그는 ‘금서’라는 이름이 붙은 그 까만 책을 천천히 읽어보기로 결심했다. 오직 나무와 바람뿐이라던 그의 삶은 과연 어떠했는지, 사람에게 이렇게 친근한 존재가 과연 그 외로운 곳에선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새삼스럽게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아직 자신에게 과제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1. 악마도 한때는 사람이었다. 이거 믿어도 되는 말인가요?
처음 이야기를 꺼낸 건 신카이였다. ‘야스토모, 우리 사귈까?’ 그게 아마 2학년 가을. 신카이는 토돌이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고 나는 조금 떨어져서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당연히 생각 해 볼 것도 없이 거절. 뭐라고 둘러댔는지는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지만 확실한건 딱히 기분이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는 여전히 아침에 만나 예의 그 왼쪽으로 제치기 훈련을 했고, 식당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팔을 부딪혀가며 밥도 먹었으며, 서로의 간식을 몰래 뺏어먹고 나 몰라라 하다가 들키는 바람에 싸우기도 하고, 심지어 샤워도 하고 온천도 같이 갔다. 고백을 들어서 혐오스럽진 않았냐고? 아니, 그것보단 우선 당황스러움이 먼저였다. 어디가 좋아서? 왜 하필 나지? 잠깐 도와줬다고 내가 생명의 은인처럼 느껴지나? 지가 진짜 토끼새낀 줄 알고 날 어미처럼 따라 다니는 건가? 그럼 그건 사랑이 아니잖아, 애착이지.
그러나 우습게도, 내 긴긴밤의 고민은 낙엽과 함께 바스라 졌다. 신카이는 꿈이라도 잘 못 꾼 사람처럼 그날의 일을 다시는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바뀐 건 없었고 우리는 여전했다. 억지로 티를 내고 싶지도 않았을 뿐 더러, 그도 그것을 바라는듯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신카이의 눈이 예전과는 같지 않다는 것을.
계절이 바뀌고, 내 몸은 날이 추워졌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이 지독한 감기 몸살에 걸렸다. 혹시 몰라 학교 근처 병원에서 맞았던 그놈의 예방접종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입원 할 정도로 호들갑을 떨 수준은 아니었지만 손가락도 까딱 하지 못하고 3일을 내리 쉬었다. 첫째 날부터 지독하게 열이 끓어올랐는데, 신카이가 찾아왔다.나는 다 쉬어가는 목소리로 꺼져, 저리가. 를 외쳤으나 그는 듣지도 않고 뒤척이느라 침대 아래로 떨어진 얼음 팩을 주워 다시 차갑게 얼려 이마 위에 올려줬고, 간호하는 기분을 낸답시고 어디선가 베개를 대여섯 개 주워와 벽에 상체를 기대게 해 죽을 떠먹였다.
물론 그의 따뜻한 배려로 감기가 씻은 듯이 나았다거나 하는 드라마틱한 일은 없었다. 대신 신카이는 내 방을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얼음 팩을 바꿔 올려주고 바람이 새어 들어오지 않도록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면서 말했다. ‘좋아해, 야스토모.’ 그게 그의 작은 변화였다.
날씨는 점점 더 매서워져만 갔고, 두꺼워지는 옷만큼 신카이의 배려도 깊어졌다. 예를 들어 다른 애들에겐 차가운 음료를 줬으면서 나에게는 마시기 적당할 정도의 따뜻한 온도의 물이라던가 차를 준다는 것. 여자 취급이냐며 틱틱거리긴 했지만 그것이 퍽 싫지만은 않았다. 그때 깨달았어야 했었던 건지도 모른다. 적어도 인정해야만 했다. 나는 신카이에게 점점 녹아들 듯 자연스레 스며들고 있었다.
3학년이 되기 직전, 나와 한 반이란 걸 알게 된 신카이의 표정은 참 볼만했다. 세상을 다 가진 자의 얼굴이 저랬을까. 그의 입은 진파치와 같은 반이 돼서 기뻐, 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항상 시선의 끝에는 언제나 내가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고대하던 새 학기가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첫 번째 당번을 떠맡게 되었다. 잘 알고 있는 사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같은 학교, 같은 기숙사 2년 동안 쓰면서 모르는 사람이 있는 게 이상한거지. 나는 툴툴대며 뒷정리를 했다. 내 미적거림에 당번 일은 부 활동 시작 시간을 훌쩍 넘겨버렸다. 우리는 교실 문을 잠그고 뒤늦게 부실로 향했다. 늦은 시간에 교정에는 아무도 없었고 단지 벚꽃만이 가득했다.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낙화해 바닥에 엉겨 붙어 더러워 질것이 뻔했지만, 흩날리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무척 아름다웠다.
학교 건물에서 부실까지 가는 길에는 아름드리 벚꽃나무가 길가로 늘어진 일명 벚꽃 터널이 있었다. 신카이는 나보다 조금 더 앞에 있었는데, 벚꽃 터널 길 중간 즈음에서 우두커니 멈춰 섰다. 나도 같이 멈췄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던 순간, 별안간 돌풍이 불었고 신카이는 휘날리는 벚꽃비 사이에서 손을 내밀었다. ‘사랑해, 야스토모.’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벚꽃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아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신카이가 오해 할까봐 대답 대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여 주었다. 신카이가 웃었다. 나도 같이 웃었다.
그 날부터, 내 몸에서는 신카이의 냄새가 났다. 항상 입에서 떼지 않는 초코바나나맛 파워바, 과자, 사탕과 같은 그런 단맛과 항상 그를 감싸고도는 여유롭고도 날카로운 감정. 그리고 날 바라보고 있는 사랑의 향기가. 내 몸에서도 그런 향이 났다.
*
뒤늦게 사춘기가 온 건지, 아니면 또 찾아 온 건지. 곧 들이닥칠 인터하이 생각도 모자라서 신카이 하야토마저 내 머릿속에 들어와 온통 난장판을 쳐놓고 나가니 지금의 나는 무언가에 미치지 않고서야 제 정신일 리가 없었다. 멍청한 내 머리는 그 두 개만 생각해도 터져 버릴 것만 같은데 소중한 훈련시간 마저 집중하지 못하고 자꾸 생각하는 게 하나 있다.
요 근래 자주 꾸는 악몽이었다. 가위에 눌린다거나 귀신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무언가에 쫓기는 그런 꿈도 아니다.사실 그게 정확하게 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사람 형체를 하고 있긴 했으니 그것을 녀석이라고 부를 뿐.
그 녀석이 처음 꿈에 나타난 건 한달 전. 난 가만히 침대위에 늘어져 있는 상태였는데 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몸에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 않아 전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가위에 눌린 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녀석은 조심스럽게 내 옆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뺨에 제 입술을 갖다 댔다. 이게 무슨 황당한 일인가 싶어 눈만 꿈뻑거리고 있었는데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정신을 차리니 아침이었고 혹시나 싶어 내 방에 누군가 침입한 흔적이 있나 살폈지만 그딴 증거는 쥐꼬리만큼도 없었다. 없는 게 당연했다. 꿈이니까.
그리고 그날 난 신카이에게 ‘나 어제 이상한 새끼랑 꿈에서 뽀뽀했다.’ 라고 말한 덕분에 하루 종일 양 볼이 터져나갈 정도로 뽀뽀세례를 받아냈다. (물론 남들 안보고 있을 때 몰래 했다. 재주도 좋으셔라) 그것만으로는 영역표시가 모자랐다고 생각했는지 저녁 먹고 내 방에 올라와서 키스까지 했다. 사실 그게 우리의 첫 키스였다. 하다못해 꿈속의 귀신에게까지 질투하는 신카이에게 리스펙트.
얼마 지나지 않아 꿈에서 녀석을 또 만났다. 이번엔 녀석과 내가 나란히 침대에 누운 채 시작했다. 심지어 난 녀석의 팔을 베고 아주 편안한 자세로 있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몸이 움직였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녀석을 바라보자, 한참동안 가만히 있더니 내 쪽으로 얼굴을 들이 미는 게 아닌가.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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